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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프로 부족할때

러시아 내 여성증후군에 대한 사회 인식 & 피임 par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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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는 젊은 여성을 가리켜 '제부쉬까'라고 호칭한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아가씨'정도 되겠다. 러시아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낮선 여성이나 가게의 여성 점원 등을 부를때(이 경우는 나이와 상관없다. 나이가 들었다고 가게 점원을 '할머니(바부쉬까)'라고 부르지 않는다)도 '제부쉬까'라고 호칭한다. 이들 제부쉬까들은 '줸시나'라 불리우는 중년여성층과 '바부쉬까'라고 불리우는 노년 여성에 비해 아무래도 해외 문물에 밝은 개방세대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중년여성들과 노년여성들이 공산주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다소 닫힌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제부쉬까들은 유럽이나 미주지역 문화에 동질감을 느끼는 글로벌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글로벌 세대들의 열린 사고방식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좋은 해외 문화나 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윗 세대보다는 없다는 것이 강점이라면 강점일 것이다.

제부쉬까들의 개방성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여성증후군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방식일 것이다. 이들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여성들에게 월경전증후군(PMS)과 월경전불쾌장애(PMDD)에 대한 사회 인식은 점차 상식화 되어 가는 추세이다. 과거 보기 힘들던 PMS 관련 책자들이 출판, 소비되고 있으며, 관련 세미나들이 대학등지에서 심심찮게 열리고 있다. 과거 피임관련 교육에만 치중하던 초.중.고 과정에서도 월경전증후군(PMS)과 월경전불쾌장애(PMDD)에 대한 내용까지 포함된 수업이 편성되는 중이기도 하다.      
          
올드 세대들이 여성증후군에 대해 초콜릿 등과 같은 음식을 활용한 식이요법 등의 다소 소극적인 방식의 대처를 했다면 이들 젊은 여성들은 경구 피임약이나 호르몬제를 활용해 피임과 여성증후군을 극복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다소 노골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피임도구(약품) 없이 어떻게 마음놓고 사랑(섹스)'를 하느냐‘가 이들의 생각이다. 이는 익히 알려진바 대로 성에 대해 개방적인 러시아 여성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원래부터 성에 개방적이었으며 낙태가 만연한 나라였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근대사를 들여다보면 꽤나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649 년에서 1749년에 이르는 100년간 러시아에서 낙태는 사형을 언도받았던 중범죄였다. 국교가 있는 종교국가라고 볼 수 있는 러시아에서 낙태는 종교(정교)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중죄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러시아 내에서 낙태는 어떤 이유라도 용납되기 힘든 도덕적이자 법률적인 범죄였다. 이러한 국가적 인식은 제국주의 시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제국주의 시절 낙태를 하게 되면 사형을 처하진 않았지만 시술한 의사와 시술을 받은 여성 모두 징역형과 같은 처벌을 받았다. 이는 당시 법률상 명시된 범죄였다. 법률적으로나마 낙태가 범죄행위라는 탈을 벗은 계기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부터였다. 당시 공산당 우두머리들은 제국시절 러시아의 종교적 전횡 중에 낙태 금지와 같은 것은 여성의 자유를 빼앗는 악법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양성 평등의 원칙과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낙태를 범법행위에서만 제외했을뿐 공산주의 시절에도 낙태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까다로운 낙태 사유 규정을 만들어 낙태를 쉽게 받을 수 있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성들을 대상으로 낙태를 함으로써 건강에 얼마나 위협을 받는지에 대한 캠페인을 펼쳤다. 1960년 경구피임제가 서방에서 개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러시아(당시 소비에트 공화국, 소련)에 최초로 피임약이 등장한 것은 이보다 20년이 늦은 1980년이었다. 자궁내장치(IUD) 또한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에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고위급 인사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희귀 품목이었기에 일반 시민들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낙태관련 통계수치가 급격히 늘어난 시기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부터였다. 물론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 자료에 신빙성을 얻기 힘들기에 구체적인 상승폭을 믿을 수 없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1,000명의 여성이 임신을 한다면 게중에 120명이 낙태를 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공식적인 통계수치가 나온 1990년에 낙태 시술건수는 연간 4백 50만 건에 이르게 되는데 이 수치는 낙태시술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개인 클리닉들의 수치를 제외한 것이기에 이보다 더 많은 낙태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낙태 시술의 사유로는 경제적 문제가 40%로 가장 높았으며, 태어날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21%,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공간(주택)문제가 15%등이었다. 다소 충격적인 것은  9%를 차지한 '임신으로 인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이란 답변이었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 내에서 경구 피임약을 사용한다고 답변한 여성은 단지 3%에 불과했다. 당시 유럽에서 51%의 여성이 경구 피임약을 사용하는 통계에 비해서 현격히 낮은 수치였다. 이러한 추세는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러시아 내에서 낙태는 가장 흔한 피임수단(50%)이란 불명예를 얻게 되었으며 러시아 정부는 줄어드는 국민수로 인해 골치를 썩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후반기부터 현재 제부쉬까라 불리우는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제부쉬까들은 피임도구 및 경구 피임약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을 주저하지 않으며, 부수적으로 월경전증후군(PMS)과 월경전불쾌장애(PMDD)등의 여성 증후군에 경구 피임약이나 전문 의약품을 활용할 줄 아는 세대이다. 다소 자유분방한 프리섹스 주의자로도 비춰질 수 있지만 자신의 몸을 지킬 줄 알고 삶을 편안하게 영위한다는 것에는 제부쉬까들의 영리함에 점수를 줄 수 있을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