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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프로 부족할때

러시아인의 성(性)인식과 피임 그리고 낙태


러시아에서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는 18세이다. 하지만 지역마다 차이가 있긴하지만 만 16세 이상의 여성이라면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다. 이 연령대는 쉬꼴라라 불리우는 러시아의 초.중.고 과정을 졸업하기만 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조혼풍습이 있던 러시아 이기에 그네들에게는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러시아는 익히 알려진대로 개방적인 성(性)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다소 전근대적인 성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러시아 통계자료(2006년)에 의하면 러시아 젊은 여성의 25%만이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일반적인 피임방법은 낙태(50%)였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 에이즈와 성병 발병률이 상당히 높아졌기에 러시아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캠페인에 예산을 편성해 계몽에 열중하고 있다. 다만 낙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에이즈에 편중된 계몽이다.

피임약이나 피임용 호르몬제 등은 러시아에서 제법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관련 의약품들 대부분이 미화 70~100$ 에 형성되고 있다. 이는 노년여성의 한 달 연금을 넘어선 가격이다. 콘돔의 경우 일반적으로 30루블(한화 1,100원 정도)에 판매된다. 어느정도 피임에 대해 인식을 하는 성인의 경우 콘돔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으나 피임 지식이 일천한 청소년들에게서 주로 원치않는 임신이 발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문에 낙태가 주된 피임법이라는 웃지못할 통계가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에서 낙태는 법적으로 규제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별도로 낙태가 허용되는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여성이 낙태를 원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임신한지 12주 이내
2. 여성이 사회적인 여건상 낙태를 원할때 임신 22주 이내
3. 임신한 여성이 아이가 태어나면 정신적, 경제적으로 크나큰 부담이 되는 경우
4. 아이가 태어나면 여성과 아이에게 건강상 치명적일 경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낙태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문에 러시아에서 낙태의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100명의 아이가 태어날 경우 대체적으로 200건의 낙태가 시행된다고 통계가 나와있다. 더불어 공공의료서비스의 운영자금 부족현상으로 인해 낙태 또한 당장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로 인해 부득이한 사정으로 일찌감치 낙태시술을 결정한 여성도 곧장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럴 경우 사비로 낙태 수술을 받아야한다. 대도시 지역(모스크바, 뻬쩨르부르그 등)은 미화 100~300$이고 시골 지역에서는 70$가 수술비용으로 소요된다.

가족계획에 대한 정부차원의 계몽이 시작된 이후로 1990년대 중반에는 약 25% 정도로 낙태율이 감소하긴 했지만 그 이후부터 다시 비율이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계몽운동 역시 자금 부족으로 활동이 멈춘 상태이다. 이를 타파하고자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그 등 대도시 학교를 중심으로 성교육을 1996년부터 시행해오고 있다. 하지만 여타 도시는 아직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첫 성관계 평균 연령이 14~17세 사이인 러시아임을 감안하면 미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원래부터 낙태가 만연한 나라였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근대사를 들여다보면 꽤나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649 년에서 1749년에 이르는 100년간 러시아에서 낙태는 사형을 언도받았던 중범죄였다. 국교가 있는 종교국가라고 볼 수 있는 러시아에서 낙태는 종교(정교)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중죄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러시아 내에서 낙태는 어떤 이유라도 용납되기 힘든 도덕적이자 법률적인 범죄였다. 이러한 국가적 인식은 제국 시절에도 이어져 내려왔다. 당시 낙태를 하게 되면 과거처럼 사형을 받지는 않았지만 시술한 의사와 시술을 받은 여성 모두 징역형과 같은 처벌을 받았다. 이는 당시 법률상 명시된 범죄였다.

법률적으로나마 낙태가 범죄행위라는 탈을 벗은 계기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부터였다. 당시 공산당 우두머리들은 제국시절 러시아의 종교적 전횡 중에 낙태 금지와 같은 것은 여성의 자유를 빼앗는 악법이라 생각했다. 이는 그네들이 추구하는 양성 평등의 원칙과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낙태를 범법행위에서만 제외했을뿐 공산주의 시절에도 낙태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까다로운 낙태 사유 규정을 만들어 낙태를 쉽게 받을 수 있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성들을 대상으로 낙태를 함으로써 건강에 얼마나 위협을 받는지에 대한 캠페인을 펼쳤다. 1960년 경구피임제가 서방에서 개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러시아(당시 소비에트 공화국, 소련)에 최초로 피임약이 등장한 것은 이보다 20년이 늦은 1980년이었다. 자궁내장치(IUD) 또한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에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고위급 인사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희귀 품목이었기에 일반 시민들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낙태관련 통계수치가 급격히 늘어난 시기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부터였다. 물론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 자료에 신빙성을 얻기 힘들기에 구체적인 상승폭을 믿을 수 없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1,000명의 여성이 임신을 한다면 게중에 120명이 낙태를 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공식적인 통계수치가 나온 1990년에 낙태 시술건수는 연간 4백 50만 건에 이르게 되는데 이 수치는 낙태시술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개인 클리닉들의 수치를 제외한 것이기에 이보다 더 많은 낙태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낙태 시술의 사유로는 경제적 문제가 40%로 가장 높았으며, 태어날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21%,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공간(주택)문제가 15%등이었다. 다소 충격적인 것은  9%를 차지한 '임신으로 인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이란 답변이었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 내에서 경구 피임약을 사용한다고 답변한 여성은 단지 3%에 불과했다. 당시 유럽에서 51%의 여성이 경구 피임약을 사용하는 통계에 비해서 현격히 낮은 수치였다. 이러한 추세는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러시아 내에서 낙태는 가장 흔한 피임수단(50%)이란 불명예를 얻게 되었으며 러시아 정부는 줄어드는 국민수로 인해 골치를 썩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후반기부터 현재 제부쉬까라 불리우는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제부쉬까들은 피임도구 및 경구 피임약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을 주저하지 않으며, 부수적으로 월경전증후군(PMS)과 월경전불쾌장애(PMDD)등의 여성 증후군에 경구 피임약이나 전문 의약품을 활용할 줄 아는 세대이다. 다소 자유분방한 프리섹스 주의자로도 비춰질 수 있지만 자신의 몸을 지킬 줄 알고 삶을 편안하게 영위한다는 것에는 제부쉬까들의 영리함에 점수를 줄 수 있을듯 싶다.
           
올드 세대들이 피임과 여성증후군에 대해 초콜릿 등과 같은 음식을 활용한 식이요법 등의 다소 소극적인 방식의 대처를 했다면 이들 젊은 여성들은 경구 피임약이나 호르몬제를 활용해 피임과 여성증후군을 극복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다소 노골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피임도구(약품) 없이 어떻게 마음놓고 사랑(섹스)'를 하느냐‘가 이들의 생각이다. 

얼마전 모스크바 한 사립병원 앞에서 낙태금지 운동을 펼치는 시민단체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 병원에서 빈번하게 펼쳐지는 낙태에 대한 반대의지를 나타낸 시위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아이를 죽이고 있다', '(아이를) 죽이지 마!'등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병원에 항의방문했다. 얼핏 90년대 중 후반 명동거리에서 흔히보던 우리네 풍경이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이날 풍경을 이미지로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