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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살아가며

민망한 통역

학생시절에  학교에 요청이 들어와서 가끔 가다 통역을 하러 나간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제가 통역을 잘해서 나간것은 아니었습니다). 게중에  출입국 관리소에서 통역을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출입국 관리소는 국내 외국인들을 관리(?)하는 국가 기관입니다. 출입국 관리소에서 제가 한 일은 전날 불법 취업 혐의가 있는 외국인들을 조사하는데 필요한 통역이었습니다.

사건개요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전날 출입국 관리소직원들이 이태원 인근의 나이트 클럽을 급습했을때 이 4명의 러시아 아가씨가 적발된 것입니다. 출입국 관리소측은 국내 기업에서 일하기로 하고 취업비자를 받고 들어온 이 아가씨들이 나이트 클럽에서 유흥행위를 했다는 단서를 잡길 원했고, 러시아 아가씨들은 단지 그날 친구들과 놀러 갔으며 불법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버티는 상황이었습니다.

통역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취조관(이하 취) : 나이트클럽에는 왜갔나?

-러시아 아가씨(이하 러) : 친구들이랑 놀러갔다.

-취 : 그런데 왜 아침 10시경에 그곳에서 자고 있었는가? (나이트클럽 단속을 한 시간이 오전 10시 경이었다는군요)

-취 : 가방에서 왜 콘돔이 나왔나?

-러 : 나는 남자랑 사랑을 나눌때 콘돔을 꼭 사용한다. 당연한것 아닌가?

-취 : (유흥행위(?)에 대한 증거를 잡기위해서 집요하게) 어떻게 친구들이랑 놀러간다면서 가방에다 콘돔을 넣고 다니나? 아무 남자나 만나서 자려고 한건가?

-러 : 그럴수도 있지않나? 그 나이트 클럽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오기때문에 맘에드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잘 수도 있는것 아닌가?

-취 : 말도 안되는 소리다!

여기서 잠시 통역의 직분을 망각하고 한마디 거들어 줬습니다 '러시아 젊은이들한테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닙니다 ...' 라고요. 아무래도 그 나라말을 배워서인지 애처롭더라고요. 게다가 당당하게 빤히 바라보면서 '나는 남자랑 잘때는 콘돔을 꼭 사용한다'고 말할때는 타당하다는 생각도 했구요. 그래서 우리 교수님이 그 날고 기는(?) 여학생들을 굳이 찾지 않으시고 날 시켰구나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뭐 이런류의 대화를 4명의 러시아 아가씨들과 차례대로 진행 했습니다.  나중에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외국인 보호 감호소 (저는 알아듣기 쉽게 감옥과 같다고 설명해줬습니다)'에 보내기 전에 사실대로 말하라는식의 대화까지 오고갔습니다. 좀 억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공무를 하시는 분들이기에 그럴거라 여겨지면서도 힘이 있는 위치에서 강압적인 대사를 쏟아내는 것에 조금 반발심이 생기더군요. 통역 중간쯤에는 전형적인 깍두기 아저씨가 찾아와서는 '여기 제가 공장에서 일시키다가 놀러가라고 나이트 보내준  러시아 여자애들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라고 찾아오기도 하고, 그 아가씨들중에 한 명의 엄마라는 교포분(고려인이라고 하지요)이 찾아오셔서 '저 사할린에서 왔어요'를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아마 교포라고 하면 공무원들이 봐줄거라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뭐 이렇게 정신없이 통역해주고 (적당히 러시아아가씨들 편도 들어주구요) 끝날때에 취조하시던 공무원 분들 중에 한분이 이런 말씀을 혼자말처럼 하신게 기억납니다

" 이거 실적이 없네...."

부디 그 때 그분이 쓰신 표현이 어떻게든 실적을 올리기위해 외국인의 인권을 무시하려 했다는 뜻이 아니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