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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cue)깍던 노인

하루하루 살아가며

by 끄루또이' 2008. 5. 14.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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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cue) 깎던 노인

벌써 3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광장동에 내려가 살 때다. 이주에 한 번 꼴로 있는 당구 생활체육 대회가 있어 제기동에 구경갔다 오는 길에, 청량리 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당구 큐를 깎아 파는 노인 이 있었다. 안그래도 선수용 상대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얼마전 5만원하던 한밭 '44B' 모델을 6만원이나 받는게 아닌가.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상대 하나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요즘 원목가격이 올라 이 이하로는 안되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 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막차 시 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노인은 큐의 모양이 잡혀지자 큐팁을 붙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기존 큐에 붙어있는 팁을 칼로 제거하고. 페이퍼를 이용해서 큐앞부분의 이물질을 제거했으며, 새로운 탭을 페이퍼 위에 올려놓고 , 원형으로 돌리면서표면을 아주조금 갈아냈다. 대략 10 바퀴 미만으로 돌려서 갈아낸뒤 돼지본드를 큐끝과 탭에 바르기 시작했다. 이후 큐끝에 탭을 살포시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서 부착시켰다. 30 초 정도 손가락으로 누르고 난 담에 그늘에서 다 붙을때 까지 건조시켰다. 순간접착제를 사용하면 될것을 시간을 끄는것 같았다. 저리 시간을 끌다니. 그렇다고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노인은 팁 깍는 칼을 날이 위로가게 하고, 큐 선골부분에 대서 탭을 위로 조금씩 큐를 돌려가며 탭을 쳐냈다 . 그리고 칼로써 거의 둥글게 모양을 만들고 난뒤 페이퍼를 접어서 팁 주변을 다듬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선골을 닳게 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칼 잡듯이 페이퍼를 접어서 잡은다음 위로 싹싹 밀어올리며 탭과 선골사이의 면이 고르게 다듬었다. 마지막으로 , 줄로 탭 윗부분을 갈아내고 , 위에서 아래로 쳐서 단단하게 마무리했다. 더불어 『당구장의 생명은 공이 아니라 , 큐 손질이우.』라고 혼잣말까지 뇌까린다. 얼마 후에야 큣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큐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 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동네 당구장에 와서 큣대를 내놨더니, 당구장 사장이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자신이 평소에 쓰는 한밭 '55B'나 심지어는 시합나갈때 꺼내 사용하는 '쥬몬 무사시' 보다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우스큐와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당구장 사장의 설명을 들어 보니, 너무 두껍고 배가 너무 부르면 당점을 잡기가 힘들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너무 얇아 연필처럼 다음어놓으면 제대로 스토록을 하기 쉽지 않단다. 더군다나 선골에 정성스레 붙여놓은 쪽팁은 모리팁과 같이 비싼것은 아니지만 잘 다듬어 놓아 당장 공을 치더라도 큐미스가 전혀 없을 정도란다. 더군다나 큐를 깍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큐 팁을 붙일줄 안다고 한다. 큐까꼬 같은것으로 대충 모양을 잡은 것이 아니라 정성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더불어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말도 부연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요새 큐는 장마철 관리를 못해 휘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큐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 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고 쉬 휘어져버린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藥材(약재)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熟地黃(숙지황)을 사면 보통 것은 얼 마, 윗길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九蒸九日暴(구증구포)한 것은 세 배 이 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 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 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 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 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 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큐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자장면에 탕수육이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여성 3구대회가 있어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 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 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 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뭉게구름이 두덩어리 피어나고 있었다. 더불어 노을에 물든 두 덩어리의 붉은 구름 또한 보였다. 구름 사이로 날아다니는 몇 마리의 기러기가 점처럼 보이면서 61.5mm 아라미스 6점구가 생각났다. 아, 그때 그 노 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큐를 깎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름을 바라보며 당심에 빠져있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採菊東籬不 (채국동리불)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도연명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집앞 당구클럽에 들어갔더니 유명한 프로선수가 연습구를 치고 있었다. 전에 없이 경쾌한 스트록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잘 골라서 손질한 하우스큐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300~400만원이 넘는 당구큐는 여러번 보아왔지만 노인과 같이 정성들여 제작된 당구 큐를 구경한 지는 참 오래다. 문득 3년 전 큐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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