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해적선의 갑판에서 태어나 성장한 놈 같다. 그의 영혼은 폭풍우와의 싸움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해안에 내던져진 그를 그늘진 숲이 아무리 유혹해도, 평화스러운 태양이 아무리 비춰도, 그는 따분하고 괴롭다."
◇ 몽롱하게 남은 어머니의 노랫소리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는 18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퇴역군인이었고 어머니는 부유한 명문귀족의 딸이었다. 어머니 쪽의 양친과 일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그러나 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알력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동안 어머니는 폐를 앓게 돼 1817년 레르몬토프가 불과 세 살 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레르몬토프의 머리 속에 어렴풋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요람 위에서 들은 어머니의 웅얼거리는 듯한 노래의 부드러운 가락, 그 멜로디는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매혹적 공상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그에게 몽롱한 기억으로 남은 멜로디는 평생 레르몬토프 귓가에 울렸고, 그는 늘 그 세계를 그리워했다. 어린 시절의 꿈 같은 기억은 단순한 하나의 사실에서 환상적이고 이상야릇한 세계로 변했고, 이것은 시적 상징이 돼 레르몬토프 작품의 특징을 이뤘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레르몬토프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개성이 강한 외할머니는 사랑하는 손자에게 양육비를 아끼지 않았다. 레르몬토프의 건강을 걱정해 세 번이나 카프카즈의 온천장으로 데려가기도 했는데, 그곳의 뛰어난 아름다움과 인상적인 산악부족들의 생활, 그리고 산악부족과 러시아 군인들 사이의 전투는 어린 소년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 뿌쉬킨의 죽음을 계기로 귀족사회 격렬히 비판 1828년, 레르몬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기숙학교에 입학해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했다.
이 무렵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는데, 뿌쉬킨의 시를 모방한 서사시 〈카프카즈의 포로〉와 <체르케스인〉을 썼다. 1830년 가을에 윤리 정치학부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면서 서정시〈천사〉,〈돛대〉등을 썼다. 1832년, 한 교수와의 의견 충돌과 부친의 죽음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모스크바 대학을 중퇴하고, 주위의 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병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뿌가초프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 《바짐》과 서사시 〈악마〉의 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1834년 가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사르스크 연대의 기병소위로 임명됐다. 군에 근무하면서 그는 화려한 사교계에 발을 내딛었다. 그러면서 글을 놓지 않고 틈틈이 희곡 《가면 무도회》, 《귀족 오르샤》 등을 썼다. 1837년 1월, 뿌쉬킨이 결투로 피살되자 그는 친구 라예프스키와 상의해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뿌쉬킨을 죽음으로 이끈 당시의 상류 귀족사회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때까지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이 시 한편으로 그는 일약 유명해졌으나, 당국에 체포돼 카프카즈의 주둔부대로 추방당했다.
1838년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1년여 만에 차르스코예 셀로 근처의 소피야 부대로 돌아와 페테르부르그에서 생활한다. 사교계에서는 그를 궁정과 화해시키려 했지만 카프카즈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경험한 그는 도시생활이 권태로울 뿐이었다. 그즈음 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 만지기 시작한 서사시 〈악마〉의 최종판을 1839년에 끝냈고, 카프카즈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완성한 《우리 시대의 영웅》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레르몬토프에게 일생일대의 대작이자 유일하게 완성된 산문작품인데,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참된 의미의 소설문학으로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 가운데 한 편인 〈공작의 딸 메리〉는 그가 유배지인 카프카즈의 온천장 파치고르스크에서 병을 빙자해 요양하고 있을 때 만난 레브로바라는 처녀가 모델이 된 것이었다.
◇ 레르몬토프 죽음의 비밀 레브로바는 그의 비명횡사의 한 원인으로도 전해진다. 주변사람들에게 독설에 가까운 익살을 퍼붓곤 해 미움을 샀던 그는 감출 수 없는 천재성과 명성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시기의 대상이기도 했다. 온천장에서 요양하고 있는 동안 페테르부르그에서 온 바르트이노프 소령과 만나게 됐는데, 레르몬토프는 이 소령에게도 날카로운 독설을 퍼부어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거기에 문제의 여인 레브로바에 대한 감정도 얽혀 있었던 것이다.
<공작의 딸 메리〉가 발표됐을 즈음, 이 작품에서 천박한 군중의 대표자로 그려진 그루쉬니스키를 바르트이노프 소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해 두 사람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났고 마침내 결투에 이르게 됐다. 결투는 작품에 그려진 주인공 페초린과 그루쉬니스키의 결투와 똑같은 상황에서 이뤄졌다.
1841년 7월15일 두 라이벌은 근교 바위산의 벼랑 위에 마주보고 섰다. 레르몬토프는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총구를 위로 향해 공중에 대고 쏘았으나 바르트이노프 소령은 혼신의 증오를 담은 눈으로 레르몬토프의 심장을 정확히 겨눠 쐈다. 이리하여 러시아의 천재는 외국인도 아닌 러시아인 자신의 손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
지상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지상 이전의 세계에 대한 몽상에 잠겨 지상을 방황하던 영원한 고독의 시인,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반항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했던 넋은 마침내 영원한 밝은 그 고향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같은 레르몬토프의 삶과 문학은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등과 같은 대천재에게로 이어져 러시아 문학의 강력한 흐름이 돼 도도히 러시아 문학 속을 지금도 흐르고 있다.
◇ 러시아 문학사에서의 위치 레르몬토프는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를 마감하는 문인이다. 그는 주코프스키, 푸쉬킨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시의 율격을 분위기에 따라 자유자재로 조정하고 서정적 서사시에 산문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하는 등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특히 그가 산문에서 보여준 심리 묘사는 이후 리얼리즘의 중심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에 의해 발전되는 등 후대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
레르몬토프의 공로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도 1820년대까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산문을 단숨에 주목받는 장르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푸쉬킨과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산문의 아버지로 불려 마땅하다. 비록 완성작은 한 편에 그쳤지만 《우리 시대의 영웅》 이후 산문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 공의 지대함을 알 수 있다. 한편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는 '자연파'의 태동에도 일조했다. 비록 뜻하지 않은 이른 죽음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들은 그의 노력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그는 분명 러시아 낭만주의가 남긴 마지막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 젊은 근위 장교 페초린은 페테르부르그에서 징계를 받아 카프카즈로 전출 명령을 받는다. 그는 부대로 향하던 중 타만에 유숙하며 밀수꾼들의 삶을 지켜보게 된다. 이후 부대와 합류해 산악 부족과 전투를 치른 후 파티고르스크에서 공작 딸 메리와 옛 연인 베라를 만난다. 이곳에서 페초린은 메리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그루쉬니스키를 결투에서 죽이고, 이 일로 막심 막시므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요새로 전출된다.
요새에 근무하면서 그는 체르케스 족장의 딸 벨라를 납치해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지만 이내 싫증을 낸다. 그러다 벨라가 납치를 당해 이를 추적하는데, 이 과정에서 벨라가 사망하자 페초린은 군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다. 그로부터 약 5년 후 페초린이 페르시아로 향하던 중 카프카즈에서 화자인 나와 막심 막시므이치를 만나는데.....